은퇴 후 가장 늦게 깨닫는 돈의 원칙

1997년, 스물이었습니다. 포장마차 리어카를 끌고 나가면서, 은행이 문 닫는 걸 두 눈으로 봤습니다.

몇 년 뒤 저는 은행원이 됐고, 그 은행 창구에 앉아서 이번엔 반대편에서 사람들을 봤습니다. 퇴직금 통장 들고 오시는 분들, 표정이 다 제각각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통장에 10억이 넘는 퇴직금을 받아도 불안한 표정이었고, 어떤 분은 훨씬 적은 돈으로도 담담하게 웃으며 앉아 계셨습니다.

20년 넘게 그 자리에 앉아서 지켜본 결과, 돈이 많고 적음이 노후의 편안함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오늘은 은퇴하신 분들이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깨닫는, 돈에 대한 진짜 원칙 세 가지를 정리해봤습니다.

[목차]

3위. 총자산보다 매달 들어오는 돈이 진짜다

은퇴를 앞둔 분들 대부분이 제일 먼저 따지는 숫자가 있습니다. “내 자산이 총 얼마냐”는 겁니다. 그런데 은행 창구에 앉아서 수십 년 상담을 해보면, 이 숫자와 실제 마음의 안정감은 별개라는 걸 매번 느꼈습니다.

창구에서 여러 번 봤습니다. 자산이 10억 원 넘게 있는데도 밤에 잠이 안 온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자산 총액은 훨씬 적어도 국민연금에 퇴직연금, 월세 수입까지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구조를 만들어두신 분들은 표정부터가 달랐습니다. 이런 분들은 돈 얘기를 할 때 불안한 기색이 없었습니다.

퇴직금을 목돈으로 한 번에 받으면 처음엔 든든하지만, 매달 얼마씩 쓸지 계획이 없으면 그 목돈은 생각보다 빨리 줄어듭니다. 연 단위로 월급을 받는다고 생각해보시면 이해가 빠릅니다. 큰돈을 손에 쥐는 순간은 기쁘지만, 쓰는 속도를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창구에서는 퇴직연금을 연금보다 일시금으로 선택하는 분들도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일시금을 스스로 월급처럼 관리하는 분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연금으로 받으면 매달 일정액을 확보할 수 있지만 당장 목돈은 없고, 일시금으로 받으면 목돈은 확보되지만 관리에 실패하면 조기에 소진됩니다.

은퇴 준비를 할 때 얼마를 모았나만 볼 게 아니라 매달 얼마가 들어오게 만들 것인가를 같이 설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자산보다 현금흐름이 노후를 지탱합니다.

2위. 아낄 때가 아니라 써야 할 때 쓰는 법

평생 아끼는 습관으로 살아온 분들일수록 은퇴 후에도 돈을 못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담하다 보면 “아까워서 해외여행 한 번 못 가봤다”고 하시는 분보다, “건강할 때 다녀올 걸 그랬다”고 후회하시는 분을 훨씬 더 많이 만났습니다. 돈을 안 쓰고 아껴서 후회하는 분은 봤어도, 여행 다녀온 걸 후회하는 분은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일부 조사에서도 경제적 만족도가 높은 은퇴자들은 돈을 써야 할 땐 아끼지 않고 쓰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났고, 그중에서도 여행에 쓴 돈을 가장 아깝지 않게 여겼습니다. 취미, 건강관리, 지인과의 교류에 쓴 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반대로 은퇴자들이 가장 많이 후회하는 소비는 계획 없이 한꺼번에 몰아 쓴 돈, 그리고 기준 없이 자녀에게 흘러간 돈이었습니다. 즉 돈을 안 쓰는 게 능사가 아니고, 어디에 쓰느냐가 만족을 가릅니다. 평생 모으기만 하던 습관에서 벗어나서, 나를 위한 경험과 관계에 쓰는 돈은 아까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은퇴 후 한참이 지나서야 깨닫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돈은 모으는 기술보다 잘 쓰는 기술이 중요합니다.

1위. 건강에 쓰는 돈이 가장 큰 투자였다는 것

은퇴 전에는 돈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창구에서 만난 은퇴자분들을 오래 지켜보면 다른 답이 보입니다. 병원비 때문에 어렵게 모은 적금을 깨러 오신 분들은 많이 봤습니다. 하지만 건강검진을 꾸준히 받아서 손해 봤다고 하시는 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자산이 많아도 몸이 안 따라주면 여행도 취미도 다 그림의 떡이 됩니다. 반대로 큰 부자가 아니어도 건강이 유지되면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훨씬 많습니다. 걷기, 규칙적인 식사, 충분한 수면처럼 큰돈 안 드는 습관이 오히려 노후 삶의 질을 가장 크게 좌우합니다.

젊을 때 술, 담배, 잦은 회식으로 몸을 해치는 소비를 하다가, 은퇴 후에는 그게 몇 배 더 큰 의료비 지출로 돌아온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돈을 벌 때는 건강을 갈아 넣어서 벌고, 그 돈을 다시 건강 회복에 쓰는 악순환입니다.

연간 건강검진비는 약 20만 원, 규칙적인 운동과 식단 관리도 소액에 불과하지만, 경증 질환 치료비는 약 100만 원, 중증 질환 치료비는 수천만 원 이상, 장기 간병비는 1억 원 이상까지 늘어날 수 있습니다. 건강은 비용이 아니라 가장 오래 남는 자산입니다.

맺음말

돈은 많이 모으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은퇴 후에는 어떤 원칙으로 쓰고 지키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총자산보다 매달 들어오는 현금흐름이 노후를 지탱하고, 여행이나 건강관리처럼 써야 할 곳에 쓴 돈은 후회가 거의 없습니다. 건강에 쓰는 돈이야말로 가장 오래 남는 투자라는 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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