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은행을 그만둘 때 수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저는 젊었습니다. 또래 동기들은 지점장을 향해 달려가는데 저는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으니 주변에서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실제로 처음에는 내 머리를 뜯고 싶을 만큼 후회할 것 같은 마음이 컸지만 돌이켜보면, 60이 다 되어서 세상에 나오면 그때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마음먹었던 초심을 잊지 않았습니다.
은퇴하고 나면 마음이 힘들다는 분들, 정말 많습니다. 힘든 이유가 사실 상황 자체보다 마음가짐에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늘은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 마음을 짚어보겠습니다.
3위. 소속감을 잃었다는 생각
매일 가던 회사, 매일 만나던 사람들이 은퇴 하루 만에 다 사라지지만, 회사는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언젠가 모두 떠날 사람들이었고, 내가 먼저 나왔을 뿐입니다.
회사라는 조직은 원래 사람이 계속 들고 나는 곳입니다. 형님이 몸담았던 자리에도 언젠가 다른 사람이 앉고, 그 사람도 언젠가는 떠납니다. 이 흐름 자체는 형님이 특별히 밀려난 게 아니라 원래 그런 구조였다는 뜻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소속감의 상실이 큰 스트레스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매일 얼굴 보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면 큰 스트레스와 상실감을 느끼기 쉽습니다.
이 소속감은 회사가 아니어도 다시 만들 수 있습니다. 동호회, 정기 모임, 봉사활동처럼 작은 단위라도 매일 또는 매주 얼굴 보는 사람들을 새로 만드는 게 핵심입니다.
2위. 떠밀려서 나왔다는 생각
스스로 정한 은퇴가 아닐수록 더 위험한데, 그 감정을 오래 붙잡고 있으면 다음 삶을 시작하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걸 통제감의 문제로 설명합니다. 내가 선택한 일은 결과가 나빠도 받아들이기 쉽지만, 내가 선택하지 못한 일은 똑같은 결과라도 훨씬 힘들게 느껴집니다.
실제로 비자발적 은퇴는 은퇴자의 주관적 건강 상태를 더 악화시키고 정신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스스로 선택하지 못했다는 감각 자체가 스트레스로 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은퇴 시점은 못 바꿔도, 지금부터 뭘 할지는 형님이 다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통제 밖이지만, 그다음 선택은 여전히 형님 몫입니다. 작은 계획 하나라도 스스로 정하고 실행해보는 것이, 잃어버린 통제감을 되찾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1위. 회사가 곧 나라는 생각
회사가 곧 나라는, 내가 곧 회사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정리하셔야 합니다. 형님은 소중한 한 사람이지 이익이 목적인 회사가 아닙니다.
심리학에서는 오랜 기간 맡아온 직업이나 역할을 자신의 정체성과 강하게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명함이 사라지면 나 자신도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회사는 원래 이윤을 남기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입니다. 그 조직의 목적과 형님이라는 한 사람의 존재 가치는 처음부터 다른 층위에 있습니다. 30년 넘게 몸담았어도, 형님의 정체성이 회사의 목적과 같아질 이유는 없었습니다.
이 동일시가 강할수록 은퇴 후 공백도 큽니다. 직업적 역할에 자신을 많이 겹쳐놓았던 사람일수록, 그 역할이 사라졌을 때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감정을 더 크게 느낀다는 경향이, 은퇴 관련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보고됩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건 극복 못 할 문제가 아니라 그만큼 형님이 그 역할에 성실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성실함을 쏟을 다음 대상을 아직 못 찾았을 뿐입니다. 정체성은 명함 밖에서도 계속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어떤 취미를 가진 사람으로서, 지금까지 회사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다른 정체성들을 다시 꺼내볼 시점입니다.
맺음말
소속감, 통제감, 정체성. 이 세 가지는 심리학에서 은퇴 적응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개념들입니다. 셋 다 회사가 채워주던 것들이었고,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 채워야 하는 것들입니다. 소속감은 출근하면 자동으로 채워졌고, 통제감은 업무 스케줄이 대신 정해줬고, 정체성은 명함 한 장이 설명해줬습니다. 은퇴는 이 세 가지를 동시에 빼앗아가는 사건입니다. 그러니 힘든 게 당연하고, 그 힘듦을 채우는 일도 한 번에 되지는 않습니다. 하나씩 다시 만들어가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