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서 일하다 보면 지점에 오시는 많은 고객들이 생활비 통장을 따로 만들어서 관리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통장 정리를 해드리면서 슬쩍 보면 정말 잔액이 넉넉한 분들이 있는 반면 늘 빠듯해 죽겠다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들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월급 오를 땐 씀씀이도 같이 늘어나는데, 정작 줄여야 할 땐 마음처럼 안 되십니다. 저도 이런 상담 정말 많이 했습니다. 오늘은 이게 의지 문제가 아니라 이미 경제학에서 설명되는 현상이라는 것을 짚어드립니다. 어쩌면 형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3위. 한 번 오른 생활 수준은 안 내려갑니다
큰 평수에 살면 작은 평수로 절대 쉽게 못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생활비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월급이 오르면 씀씀이도 같이 늘어나는데, 나중에 수입이 줄어도 씀씀이는 그대로 남습니다. 경제학자 듀젠베리는 소비가 단순히 내 소득 크기가 아니라, 남들과의 비교와 과거에 내가 누렸던 최고 생활수준의 영향을 받는다고 봤습니다. 한 번 올라간 생활수준은 기준점이 돼버려서, 그 아래로 다시 내려가는 걸 심리적으로 거부하게 된다는 겁니다.
듀젠베리의 상대소득가설에서는 소득이 줄어도 소비가 쉽게 감소하지 않는 경향을 톱니효과라고 설명합니다. 소비가 한번 오르면 쉽게 내려가지 않는 하방 경직성을 설명하는 개념입니다. 톱니바퀴가 한쪽 방향으로만 돌고 거꾸로는 잘 안 돌아가는 모습에 빗댄 이름입니다.
한 번 오른 생활 수준에 익숙해지면, 그 수준을 다시 낮추는 데는 소득이 오를 때보다 훨씬 큰 심리적 저항이 따릅니다. 은퇴나 이직으로 소득이 줄어드는 시점에 가장 크게 부딪히는 문제가 바로 이겁니다.
퇴직 직후 소비를 갑자기 확 줄이기 어려운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월급이 끊긴 첫 달보다, 오히려 몇 달이 지난 뒤에야 씀씀이가 서서히 줄어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의지 부족이 아니라 톱니효과가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2위. 안 보이는 지출이 계속 쌓입니다
OTT, 정기배송, 멤버십 같은 작은 구독료가 매달 자동으로 빠져나가는데, 하나하나는 적어도 다 더하면 꽤 됩니다.
구독 서비스가 잘 해지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행동경제학에서는 현상유지 편향을 꼽습니다. 일단 시작한 걸 그대로 유지하려는 심리적 경향입니다. 넷플릭스 등 많은 구독 서비스는 자동결제나 자동재생 같은 기능을 제공하는데, 행동경제학에서는 이런 설계가 현상유지 편향을 강화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카드 명세서를 안 보면 뭐가 얼마씩 나가는지 자기도 모릅니다.
한 달에 한 번은 카드 명세서나 자동이체 내역을 쭉 훑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안 쓰는 구독 서비스 하나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생활비 줄이는 효과가 꽤 즉각적입니다.
특히 은퇴 이후엔 재직 시절 업무용으로 유지하던 구독이나, 자녀가 독립하면서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가족용 서비스가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번쯤 전체 구독 목록을 쭉 정리해보시는 것만으로도 매달 고정비를 상당히 줄이실 수 있습니다.
1위. 특별한 날은 예외로 칩니다
“오늘은 특별하니까”, “이번 달은 힘들었으니까” 하면서 소비를 정당화하는 순간이 너무 많습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리처드 탈러가 제시한 멘탈 어카운팅, 즉 심리적 계좌 개념이 바로 이겁니다. 같은 금액이라도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서로 다른 계좌로 구분해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똑같은 1만 원을 잃어버려도, 현금으로 잃어버렸을 때보다 이미 산 영화표를 잃어버렸을 때 사람들이 느끼는 심리적 타격이 다릅니다. 같은 금액인데도 마음속 계좌가 다르게 설정돼 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대출 상담을 하면 소득은 늘었는데 저축은 그대로인 분들 정말 많이 봤습니다. 그때마다 공통적으로 나온 말이 “이번 달은 좀 써야 해서”였습니다. 그 써야 하는 달이 매달 한 번씩은 꼭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우연인지 아니면 일부러 만드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세 가지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
톱니효과, 현상유지 편향, 멘탈 어카운팅. 이름은 다 다르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셋 다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원래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작동해서 벌어지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생활비가 안 줄어드는 걸 자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 세 가지 심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고 나면, 대응 방법도 달라집니다. 무작정 아껴야지 다짐하는 대신, 구독 목록 점검하듯 구조적으로 확인하는 습관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오늘 당장 확인해볼 세 가지
첫째, 지난 3개월 카드 명세서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톱니효과는 눈에 보여야 인지가 됩니다. 월별 총액을 비교하면 어느 항목이 슬금슬금 늘었는지 바로 드러납니다.
둘째, 자동이체와 구독 목록을 한 화면에 쭉 나열해보시기 바랍니다. 스마트폰 은행 앱이나 카드사 앱에 보통 정기결제 조회 메뉴가 따로 있습니다. 이걸 한 번도 안 열어보셨다면,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셋째, 이번 달 특별한 지출이 있었다면 이유를 적어보시기 바랍니다. 경조사인지, 그냥 기분 전환이었는지 구분해보는 것만으로도 멘탈 어카운팅이 언제 가장 강하게 작동하는지 스스로 알게 됩니다. 패턴이 보이면 다음 달부터는 미리 대비할 수 있습니다.
맺음말
정리하겠습니다. 한 번 오른 생활 수준은 톱니효과 때문에 쉽게 낮아지지 않습니다. 구독료 같은 안 보이는 지출은 현상유지 편향 때문에 계속 쌓입니다. 특별한 날의 지출은 멘탈 어카운팅 때문에 쉽게 정당화됩니다. 이 세 가지는 큰 결심이나 의지력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 그냥 한 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시작됩니다.